The following is Introduction: Theories of Stalinism from the book The Life and Death of Stalinism by Walter Daum as translated by the Research Institute for Social Practice in Seoul, Korea, and published in their monthly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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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스탈린주의에 대한 여러 이론들

(이 글은 Walter Daum의 책 『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 : 맑스주의 이론의 부활』(The Life & Death of Stalinism : A Resurrection of Marxist Theory)가운데 「서문 : 스탈린주의에 대한 여러 이론들」(Introduction : Theories of Stalinism)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의 혁명당동맹(the League for the Revolutionary Party : LRP)의 견해인 트로츠키주의적 입장에서 쓴 것이다. (편집자 주))

월터 돔(Walter Daum)(저자는 1939년을 기점으로 소련이 반혁명으로 돌아섰다고 보는 ‘자칭’ 트로츠키주의자이다. 이 글에는 저자의 이런 관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본 연구소의 입장과 상관없이, 이 글은 <소련사회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싣게 되었다. 앞으로 이와 관련한 논쟁이 벌어졌으면 한다. (편집자 주) )

소련을 창조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우리 시대에 결정적 사건이었다. 최초로 근대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전 세계 피착취 피억압 민중을 위한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인간의 타락을 끝장낼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사회주의자라면, 이 노동계급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파괴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야 할 책임이 있다. 1917년 이래로 사람들은 "러시아 문제", 즉 소련의 계급적 성격을 두고 열띤 논쟁을 벌여왔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자. 혁명 직후 소련은 노동자 국가로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회였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많은 자본주의적 잔재를 짊어지고 있는 사회였다는 점이다. 갓 태어난 노동자 국가는 이런 장애물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특히 다른 나라의 혁명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또한 후진적이던 러시아에 이것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혁명 직후에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급속히 퇴화했다. 즉 노동자들은 얻은 것을 빼앗겼고 국제 혁명은 저지당하고 패했다. 1920년대 중엽에 이미 소련은 관료주의적으로 퇴행한 노동자 국가가 되었고 세계 혁명 정당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은 반혁명적으로 변했다. 스탈린주의는 국내외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을 방해함으로써 소련이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길을 터주고 말았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치장한 자본주의로 보는 견해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레온 트로츠키는 1930년대 중엽에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복원하고 사회주의 성과를 보존하기 위한 "정치혁명"을 옹호하였다. 1930년대 말 그는 반혁명적 스탈린주의 때문에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되기 직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 계급이 그러한 국가에 무조건 충성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공격에 맞서 국가를 방어해야 할 정도로 노동자 국가는 가치가 있었다.

우리는 1939년까지는 트로츠키의 이러한 전망에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혁명이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반혁명으로 인해 국가기구가 변형되고 볼셰비키 당이 파괴됨으로써 새로운 지배계급이 형성되었다. 트로츠키가 내다본 것과 달리 자본주의는 완전히 부활하였다. 잘 알려진 스탈린주의의 중앙집권화는 국유재산을 효과적으로 분산하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러한 국유재산을 분산하는 조치는 오늘날 분명히 볼 수 있는 "시장"과 무정부상태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그때부터 스탈린주의적 사회들은 가장 근본적인 뜻에서 자본주의 사회였다. 즉 그런 사회들의 기초는 프롤레타리아트와는 성질이 다른 지배계급에 의한 임금노동의 착취다. 이런 쇠퇴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은 부르주아의 전통적 규범에서 보더라도 어디에서나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스탈린주의가 통치하고 있는 사회주의만큼 왜곡된 곳은 없다. 스탈린주의적 사회들에서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은 반혁명이 빼앗아간 노동자 국가의 사회주의 잔재를 통해 더욱 뒤틀려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스탈린주의 소련은 자본주의의 생존에 몸을 바치는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었다. 소련은 수백만 명을 자신의 발밑에 두었다. 더욱이 지배적인 서방 제국주의자들을 위하여 소련은 유럽에서는 노동자 혁명을 분쇄하고 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투쟁을 배반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이 전 세계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부의 노예인 빈곤과 풍요 속의 굶주림으로 가득 찬 세계에 살게 되었다. 한때 자본주의의 착취는 거의 사멸해가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제 곳곳에서 도전할 수 없는 삶의 현실로 간주된다. 엄청난 생산력은 인간에게 쓸모 있는 크나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지배 아래 생산력은 줄곧 빈곤화와 생태계의 파멸, 그리고 핵전쟁을 불러오는 조짐이었다.

수십 년 동안 소련과 그 위성국들은 국제 사회에서 버려진 자식들이었다. 그 나라들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착취하든, 제국주의의 안정을 돕든 상관없이, 전 세계 부르주아지는 소련과 그 위성국들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사회주의적 주장과 재산의 국유화, 그리고 소련의 프롤레타리아적 역사 이 모든 것들은 부르주아의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도 1956년 폴란드의 노동자 평의회와 헝가리 혁명(1956년 2월 흐루시초프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을 계기로,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폴란드에서는 1956년 6월 28일 포즈난의 스탈린 주철 공장 노동자들이 정부의 노동정책에 항의하여 시위를 일으켰으나, 곧 반정부시위, 더 나아가 반소련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폴란드의 반소련 움직임은 1956년 10월 19일 고물카 전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가 당중앙위원에 복귀하여 친소파인 로코소프스키 원수를 국방장관에서 해임하는 문제로 드러났다. 고물카는 당시 폴란드를 방문한 흐루시초프에게 ‘사회주의의 길은 하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소련은 이러한 이탈 움직임이 동유럽 전체에 확산되는 것을 꺼려 고물카의 의견을 들어주면서, 신속히 마감한다. 반면 1956년 헝가리 시위는 전혀 다르게 다루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이후 헝가리는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소련에 종속되어 있었다. 헝가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소련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헝가리의 경제는 소련의 경제계획에 따라 조정되었다. 헝가리의 자원은 소련의 생산을 위해 생산되었고, 그나마 불평등한 무역으로 수탈되었다. 이로 인해 헝가리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다. 식량도 부족했고, 공장을 가동할 연료도 턱없이 부족했다. 일반 대중들의 불만이 고조되어가자, 소련은 폴란드의 '포즈난 항거'와 같은 사태를 우려하여, 헝가리의 오랜 독재자이자 '소(小)스탈린’이라 불린 라코시를 제거한다. 하지만 후임자는 라코시의 측근이었던 게뢰였다. 게뢰는 부분적인 양보조치를 강구하였지만 대중들은 에 만족하지 않았다.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드디어 작가·학생·시민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시위가 조직된다. 이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은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독자적인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해서 조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경제적인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계획의 수정을 원했고, 공장의 운영에 노동자를 참여시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임금 수준을 개선하고 생활수준의 향상도 요구했다. 소련은 헝가리 시위를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한다.)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스탈린주의 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망이 보이면 언제나 서방당국은 증오심을 가라앉히고 개혁과 안정을 요구하였지 위협당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전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결정적 시기에는 계급이 말한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모든 그럴듯한 마르크스주의 이론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이론들은 네 가지 범주로 나뉜다. 즉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1) 사회주의적이라는 견해, 2)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국가(노동자 국가)라는 견해, 3) 국가자본주의라는 견해, 4)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적대적인 제3의 체제라는 견해이다. 이런 분류는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범주들 사이의 논쟁만큼이나 중요한 논쟁이 4개의 범주 각각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범주 내에 속하는 이론가들도 종종 견해를 달리한다. 보기를 들면 언제 소련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전환되었는지, 소련과 같은 성격 규정이 소련형의 모든 국가들에게도 적용되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한다.

우리는 러시아 문제에 대한 논쟁이 얼핏 보기에는 광범위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협소한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표면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네 가지 이론은 공동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그 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자본주의의 관례적인 분석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바로 그 이유에서 우리는 러시아를 여전히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보는 "정통 트로츠키주의"의 태도도 거부한다.

우리는 네 가지 범주를 차례로 거론할 것이다. 우리의 서론적 개관에서는 이 책이 깊이 있게 증명하게 될 여러 가지 결론이 제시될 것이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바라보는 이론들

소련형 국가들이 사회주의라는 생각은 보통 경제가 국유화되었다는 단순한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 오래 전에 엥겔스는 사회주의를 국가소유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했다.

"하지만 최근 비스마르크가 공업 시설을 국가소유화 하는 것에 찬성한 이래, 일종의 사이비 사회주의가 등장했고, 심지어 여기저기에서 일종의 아부로 전락하여, 대놓고 국가소유는 전부 사회주의라고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

스탈린이 1930년대 중반에 사기업가들을 제거한 뒤 소련에는 "사회주의"라는 칭호가 붙었다. 놀랍게도 소련을 사회주의 국가로 선언한 것은 소련 혁명으로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회를 지배하는 노동자 국가(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달성되었다는 초기 볼셰비키의 이해와 모순되었다. 계급 없는 사회로 발전해가는 특정단계인 사회주의 그 자체는 심지어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일지라도 고립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후진적이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소련의 경우에 사회주의는 더더욱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오늘날 소련과 그 동맹국들의 공산당은 그 "사회주의" 명제를 지지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논지는 재산의 국유화가 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생산양식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주의가 지닌 문제가 무엇이든지 두 가지 뜻에서 진보적인 사회로  생각한다. 즉 그 사회는 노동민중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고 자본주의가 지닌 것보다 훨씬 월등한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소련형 사회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무계획적인 법칙을 지배한다고 한다. 즉 사회적 계획이 자본주의 경제를 지배하는 가치법칙을 통제한다. 자주 거론되는 증거는 이러한 나라들에는 거의 혹은 전혀 실업이 없다는 것, 자본주의의 가난과 비교할만한 대중빈곤이 전혀 없다는 것, 지나친 부의 격차가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경쟁 때문에 노동이 2배로 낭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30년대 사람들은 소련 공업의 확장(소련 노동자들의 권리들과 생활수준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을 지적할 수 있고 소련의 공업을 공황에 괴롭힘 당하는 자본주의에 필적할 만 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럴 수 없다. 1980년대 초 폴란드 경제의 붕괴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그 어떤 나라의 경제 붕괴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유럽 전체를 실업과 통화팽창 상태에 빠트리고 있다; 소련 지도자들은 그들이 다루어야 하는 경제적 재앙에 대해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기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서방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인류 진보의 새로운 단계를 대표하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다.

1960년대에 몇몇 좌파는 중국의 관료집단이 혁명적 민족주의 투쟁과 동맹하려는 노력을 동정했기 때문에 중국에 사회주의 명제를 적용했다. 하지만 중국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려면 특히 의지주의적이고 반(anti) 유물론적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혁명 뒤 초창기 소련과 견주어 볼 때, 혁명적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 훨씬 더 경제적 발전을 저지당했기 때문이다. 지도적인 어떤 이론가는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결국 생산력 발전의 낮은 수준이 사회적 관계의 사회주의적 전환에 장애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고 썼다. 사회적 관계의 사회주의적 전환은 통치하는 당의 "올바른 정치노선"으로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2) 이런 논리대로라면 애초부터 인간의 비참함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아담과 이브가 사과 대신에 붉은 소책자(『모택동 어록』-옮긴이)를 발견하기만 했더라도.

이것과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 명제는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명제이다. 그들은 유행하는 부르주아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혹은 그것에 도전하려는 의지가 없다). 그런 자들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관한 박식한 글들을 쓰면서 사회주의의 "체제" 위기를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금도 역겨움을 느끼지 않은 채.

스탈린은 처음에 소련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부정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선언하면서 소련이 "인민"의 국가라고 선포하였다. 그 용어가 갖는 반 노동계급적 뜻은 현재 온갖 용도로 확대되고 있다.

스탈린주의를 노동자 국가로 보는 견해

트로츠키가 죽은 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을 자본주의의 부활로 나아가거나 또는 새로운 노동자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퇴행적인 노동자 국가라는 평가를 형식적으로 유지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뒤처리가 끝나자, 스탈린주의는 동유럽과 중국, 그 밖의 지역에서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내용이 아니라) 껍데기만 트로츠키의 용어를 유지하려는 신 트로츠키주의자들 대부분은 수식 어구를 붙이면서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주의가 사실은 반혁명적이 아니었다고 에둘러 말했다. 한참 동안 이런 견해의 지도적 이론가는 에르네스트 만델이었다.

산티아고 카리요와 같은 유로코뮤니즘의 지지자들과 모택동주의의 영향을 받은 저자들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3) 그들은 스탈린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르다. 게다가 그들의 주요 주장도 정교하게 다듬어 지지 않았다.

소련을 사회주의로 보는 이론에 반대하면서, 노동자 국가론을 지지한 사람들은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그 자체로 사회주의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탈린주의적 국유화가 그 자체 진보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그 경제적 기초를 변모시키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진정한 사회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논지를 약화시킨다. 오늘날 그 많은 스탈린주의 체제들이 붕괴하는 것에 비춰볼 때, 그런 결론은 근거 없는 낙관론임이 드러난다. 더욱이 트로츠키는 결코 그런 결론을 내린 적이 없다. 트로츠키는 후진성과 고립 때문에 소련이 국제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법칙에 종속되고 재산을 국유화하였다 하더라도 국내적으로는 가치관계가 적용되었다고 이해했다. 사회화를 이루려면 소련은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질적인 경제적 진보를 이루어야 할 것이었다. 오늘날 스탈린주의적 국가들에 전형적인 후진성과 위기는 "사회주의"의 명제만큼이나 "노동자 국가"의 명제를 손상시킨다.

더구나 이 두 이론은 압도적인 모순에 부딪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스탈린주의의 지배는 군사력의 도움으로 동유럽 전체로 퍼졌다(그리고 중국을 비롯하여 몇몇 나라에서는 무장혁명을 통해서). 이 신생국가들은 대체로 그들 스스로를 "새로운" 민주주의 또는 "인민" 민주주의라고 불렀지만 소비에트 모델을 채택했다. 즉 그들이 주장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로 기운 좀 더 민주적인 자본주의였을 뿐이다.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 보는 이론가들 대부분은 이 신생국가들에 "왜곡된" 또는 "관료화한" 노동자 국가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국가들은 노동계급의 혁명 없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자들이 공장을 통제하고 통치하는 평의회를 수립하려는 노동자들의 시도를 분쇄한 뒤 형성되었다.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이든 이런 창조물을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역사를 외면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에 프롤레타리아라는 명찰을 붙이는 것은 노동자 국가가 노동자들 자신의 의식적 활동을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의 결론을 냉소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신의 과제다." 또한 신(neo) 트로츠키주의 사상은 노동자의 사회주의 혁명에는 전위당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레닌의 가르침을 의문시한다. 권력을 잡자마자 사회주의가 자신들의 목적이었음을 부정한 스탈린주의 정당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으로 충만한 전위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해방이라는 맑스의 원리는 결코 추상적인 독단이 아니다. 맑스의 원리는 자본주의의 분석에서 나온다. 즉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공산주의를 세우려는 투쟁력을 본래부터 지닌 계급을 유기적으로 창출한다. 또 다른 계급에 이런 프롤레타리아적 특징을 부여함으로써 왜곡된 노동자 국가론자들은 스탈린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를 거부한다. 우리는 뒤에 그들의 잘못된 사상의 물질적 근거와 실천적 결과를 분석할 것이다.

국가자본주의론

이 폭넓은 범주에는 몇 가지 분파가 있다. "극좌파"는 소련이 임금노동과 같은 자본주의 형식들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을 자본주의로 묘사한다. 즉 그들은 소련의 자본주의가 1921년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에서 또는 더 일찍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맑스의 국가론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처럼, 극좌파는 노동자 국가가 일시적으로나마 자본주의의 잔재를 온존시킬 필요성을 부인한다. 가장 유명한 이론가인 폴 매틱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운동법칙인 가치법칙이 스탈린주의에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실은 제3의 체제론이다.

두 번째 분파는 주로 과거 트로츠키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소련 역사에서 퇴행적 노동자 국가이었던 때가 있었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국가자본주의의 부활 시점을 스탈린이 강제적 공업화와 농민층에 대한 징발을 시작했던 1928년 제1차 5개년 계획이 착수되었을 때로 잡았다. 토니 클리프는 이런 견해의 중요한 지지자다.

매틱처럼, 클리프는 소련 경제에서 가치가 내적 관계의 원동력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러시아는 경쟁 자본주의의 무정부상태가 아니라, 지배자들의 의식적 의지를 통해 내부적으로 다스려 지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과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은 서방과의 군비 경쟁을 통해서만 경제 안에서 작동된다. 군비 경쟁은 스탈린주의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대대적인 자본축적에 착수하게 한다. 가치법칙을 외부로부터만 도입함으로써 이 논지는 사실상 맑스주의적 의미에서 이 체제가 자본주의적임을 부인한다. 따라서 클리프의 이론 역시 근본적으로 제3의 체제론이다.

과거 트로츠키주의자에 속하는 또 다른 흐름은 제2차 세계대전 뒤 형성된 프랑스의 "사회주의냐 아니면 야만이냐" 경향이었다. 그들은 계획이 경제의 무의식적 기능 작용을 제거한 나라에서 가치법칙이 적용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소련과 그 위성국들에게 "관료 자본주의"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 이것은 아마 비자본주의적 "자본주의"론으로서는 가장 분명한 것이 될 것이다.

1940년대 미국에서 라야 두나예프스카야와 C.L.R. 제임스가 지도한 존슨-포레스트 경향은 더욱 강력하게 자본주의적 분석을 시도했다. 존슨-포레스트는 소련에서는 가치법칙이 임금노동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주목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이론에 근본적인 요체다. 그러나 매틱과 클리프처럼, 그들은 자본주의 형식이 노동자 국가에 내재한 것이라는 사상을 부정했다. 더욱이 그들은 국가자본주의를 미국을 비롯한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 적용되는 "세계적인 중앙집중화 경향"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없이도 미국경제의 완전한 중앙집중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태도는 (칼 카우츠키의 "극단적 제국주의" 뿐만 아니라) 몇몇 극좌적 경향들도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핵심은 스탈린주의가 경제를 중앙 집중화하고 과학적으로 계획하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가 하나의 자본주의로 규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국가 자본주의자들의 제3의 분파는 모택동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프롤레타리아 노선"을 거부한 뒤 소련과 관계를 끊었다. 그들은 당의 올바른 노선이 어떤 나라가 절망적인 경제 환경을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이룩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노선의 변화로 당의 계급적 성격이 바뀔 수 없다고 논리적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러시아의 계급적 본질이 스탈린 사후 자본주의로 되돌아갔다고 - 계급관계나 경제조건이 털끝만치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 주장했다. 나아가 일부 모택동주의자들은 모택동 사후 중국에 대해서도 똑같이 추론했다. 소련 자본주의에 대한 모택동주의자들의 관념론적 이론은 사실상 그들의 정치노선이 기회주의적으로 서방 제국주의와의 조정으로 (보기를 들면 1972년 중-미 국교정상화 :  옮긴이) 돌아선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런 선회의 골자는 소련이 자본주의이며 서방보다 "훨씬 큰 위험"이라는 것이었다.

과거 모택동주의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러한 속임수와 중국이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것에 반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난했을 때 소련이 자본주의가 되었다는 모택동의 격언을 더 이상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소련을 사회주의라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똑같이 황폐한 개념을 유지하였다.

중국공산당은 그들의 반유물론적 입장에 이론적으로 지지하는 까다로운 문제를 다른 공산당에 넘기면서, 흐루시초프의 노선변경이 러시아를 자본주의로 만들었다고 주장한 사상의 발원지였다. 소련경제의 분권화와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탈색이 스탈린 사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가장함으로써 이 과제는 해결되었다.

샤를 베틀하임은 가장 세련된 모택동주의 이론가이자 자본주의 법칙이 국가주의적 형태로 운용된 것을 통찰한 저술가였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관념론은 그나마 남아있는 맑스주의 분석에 충실하고자하는 자신의 시도를 압도해 버렸다. 소련에 관한 4권으로 된 저작의 서두에서 그는 신경제정책에서 구체화된 노동자-농민 동맹을 스탈린이 파괴한 1920년대 말에 이미 "프롤레타리아 노선"이 폐기되었음을 넌지시 말했다. 저작의 말미에서 그는 반혁명뿐만 아니라 혁명도 거부하기로 했다(애석하게도 정당한 근거를 거의 밝히지도 않으면서 : 약 2000쪽에 이르는 저작에서 단 몇 줄을 제외하면). 그는 이제 볼셰비키 혁명 덕에 "인텔리겐차의 급진적 분파"가 권력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볼셰비키 혁명은 "결국 직접 생산자를 급진적으로 수탈한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혁명’이었다." 스탈린의 후계자와 그 뒤 모택동의 후계자들을 제거할 때, 구실은 올바른 당 노선이었다. 모택동주의 방법에 따르면, 이러한 올바른 당 노선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결정하기도 한다. 이런 방법에 따른 베틀하임은 결국에는 레닌마저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매틱과 클리프 등은 국가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의 핵심적 기능 작용을 부정함으로써 사실상 가치를 생산하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없는 자본주의를 정의하고 있다. 관념론적 모택동주의 해석은 이런 부정을 훨씬 더 멀리 밀고 나간다. 즉 그 체제의 본질이 지배자들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스스로 행동하는 계급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범주("공로 있는 빈민")로나 있게 된다.

스탈린주의를 제3의 체제로 보는 이론

소비에트 체제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두 체제 사이의 이행기적인 것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소련이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만 의견을 같이 하는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경험주의적이며 상식적인 견해다. 그들이 관찰하기에 소련에는 분명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두드러진 특징들이 없다. 자본주의와 반대로 소련에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전혀 없으며, 따라서 자본들 사이의 경쟁도 없다. 사회주의 또는 노동자 국가와 반대로 그곳에는 대중적 정치권력과 민주주의가 없다.

자신들의 분석이 본질적으로 부정적이라 가정하면, "제3의 체제"론의 필자들은 자연히 소련형 사회들이 그것들이 대체한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진보적인 것인지 여부에 대해 견해를 달리한다. 루돌프 바로, 폴 스위지 그리고 움베르토 멜로티는 소련형 사회들을 자본주의에 비해 "진보적"이라고 해석한다. 진보적이지도 않다는 초창기 이론은 브루노 리지와 막스 샤흐트만의 "관료적 집산주의"였다. (당초 샤흐트만은 관료적 집산주의를 진보적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의 저작의 주요한 부분이 아무런 언급도 없이 바뀌어 이 과거의 죄를 숨겼다.) 밀로반 질라스를 비롯하여 동유럽의 필자들이 몇몇 "비 진보적" 이론들을 제시해왔다. 또한 소련에 역동성이라고는 전혀 없고 어떤 생산양식도 전혀 없으며, 체제적 낭비가 우세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로 묘사하는 이상야릇한 견해도 있다.

좌파적 제3의 체제 이론가들은 부르주아 여론의 압력 아래 "민주적" 서방이 동방에 견주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위험성에 맞닥뜨리고 있다. 고전적인 실례가 샤흐트만이다. 그는 스탈린주의 아래에서는 금지되었던 노동조합권이 노동계급의 결정적 관심사라는 까닭으로 트로츠키주의에서 서방제국주의에 이르는 전체 조류를 이끌었다. 오늘날 샤흐트만의 추종자들은 AFL-CIO(미국노동총연맹-산별조직회의)의 국제 활동뿐만 아니라, 미국 노동조합 관료의 몇몇 분파를 이끌고 있다. 이런 능력으로 그들은 노동조합의 관료들이 자본주의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지니게 된 근원인 이윤을 노동자들이 갉아먹는 것을 예방하고자 성자라도 되는 것처럼 노동조합 투쟁을 억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대체로 제3의 체제 이론들은 새로운 형태의 계급사회를 발견한 것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어떤 과학적 분석도 - 운동법칙 -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폴란드의 맑스주의자들인 자섹 쿠론과 케롤 모젤류스키의 해설이 아마 운동법칙을 제시한 유일한 것이리라. 1960년대 "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이 정권의 전복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징역을 살았다. 어느 정도 그들의 분석이 합당한 부분도 있지만, 국가화된 자본주의의 이론은 완전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의 저작에서 통찰력 있는 부분을 우리 자신의 이론에 통합시켰지만, 그 저작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들도 포함되어 있다.

제3체제론이 지닌 이론적 부주의함은 상반되는 두 이론적 변형을 통해 증명될 수 있다. 한 가지 변형은 소비에트의 관료적 집산주의가 1965년 경제 대개혁을 통하여 평온하게 자본주의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본다. 다른 한 가지 변형은 카스트로 통치 아래 혁명을 겪었으나 여전히 자본주의적인 쿠바가 관료적 집산주의로 변모해갔다고 본다. 맑스주의자의 변혁론에 따르면, 혁명을 겪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로 변모할 수 있거나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는 줄곧 자본주의적이었음이 틀림없다. 물론 동일한 논리가 1989년 말 스탈린주의 사회들이 겪은 실질적인 전환에 적용된다.

제3의 체제 이론들의 이론적인 큰 결함은 그 체제를 비자본주의라고 부르는 한편, 생산자들의 주된 계급을 "노동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자본과 관련될 때에만 하나의 계급이 된다. 맑스가 썼듯이, "자본은 임금노동을 전제하고 임금노동은 자본을 전제한다. 그것들은 상호 상대 존재의 조건이 되어 상대방을 생성시킨다." 사실 어떤 착취관계에도 특정한 두 계급이 필요하다.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무산계급은 그 노동력을 사는 계급, 자본가 계급 -자본을 구체화하는 자들 - 에게 착취당할 뿐이다.

제3의 체제론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런 이론적 딜레마를 늘 인정해왔다. 샤흐트만은 소비에트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노예들 또는 "새로운 종류의 국가적 농노"라는 사상으로 장난을 쳤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아래 노동자들처럼 행동했다. 실제로 1953년 6월 봉기한 동베를린의 노동자들은 스탈린주의 체제에 저항하여 행진하며 "우리는 노동자이지 노예가 아니다"라고 노래 불렀다. 샤흐트만은 물러서서 그들을 현재 있는 그대로에 맞춰 이름을 불렀다. 그럼으로써 그 또는 다른 어떤 이의 제3의 체제론의 기초를 파괴하는 딜레마에 굴복했다. 베를린 노동자들은 정확히 올바른 주장을 했다. 즉 그들의 피착취의 정수는 임금노동이라는 내용이지 피상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3의 체제론이 피상적 수준에 사로잡혀있음을 증명해주었다.

공통이론

스탈린주의 체제를 기술하는 여러 이론을 보고 그 이론들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핵심적인 역사적 변화를 예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결국 어떤 이론이 올바른지 그른지를 증명해주는 것은 실천이다. 이제까지 맑스주의 사상가들이 그들의 사상을 검증할 수 있는 실천적 기회는 아주 많았다. 그러므로 더더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정평이 있는 이론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오늘날 스탈린주의의 위기와 그것이 자본주의의 전통적 형태로 퇴행한 것을 예상하기는커녕 설명조차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어떤 뛰어난 이론가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위지는 "포스트-혁명 사회"와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내가 알기에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라는 견지에서 그런 사회들의 발전을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해왔다. 더욱이 우리는 맑스의 자본의 법칙을 이용해서 스탈린주의의 현재 방향을 예상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밖의 점에서 스위지는 옳다. 즉 대체로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으며 운동법칙이 없다면 그들의 이론에 예견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운동법칙의 생략은 특히 소비에트 체제가 자본주의라고 믿는 사람들 쪽에서 두드러진다. 이미 주목했듯이 매틱과 클리프는 그 체제의 핵심으로서 가치법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국가자본주의 분석은 좀 더 맑스주의로 변장한 제3의 체제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행기 국가론도 운동법칙을 부인한다. 이런 나라들이 진정 노동자 국가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적 계획이 자본주의의 무계획적 법칙들을 대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델등이 주장하는 "탈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와 견주어 진보적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질적으로 진보적인 발전을 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만델의 말대로 관료화된 노동자 국가들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얼어붙었다." 내적 동력이 없다면, 스탈린주의 국가들에는 이행기적인 것이 전혀 없다. 따라서 그 국가들은 노동자 국가들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만델의 이론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있는 제3의 체제론이라고 생각해야만 만델에게는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다.

따라서 소비에트 체제에 관한 주요 이론들은 모두 결국 하나의 범주, 즉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체제로 환원된다. 게다가 제3체제론도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나 다른 어떤 것도 발생시키지 않는 생산양식을 가정하고 있다. 그 생산양식은 무계획적인 법칙이 아니라 중앙의 결정을 통해 지배된다. 그러므로 그 사회에는 정체와 붕괴에 관한 내재적 이유도, 근본적인 계급갈등도 전혀 없다. 잘못된 계획이나 억압만이 체제 전반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정태적인 스탈린주의라는 개념은 심각한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내적 운동이 없는 사회는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지 못한다. 대중은 고난과 전제정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자기조직의 혁명적 형태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 의식을 습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계급투쟁은 한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한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대조해보자. 계급투쟁은 한편으로는 위기와 쇠퇴로 이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조직을 강화시킨다.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착취에 저항하고 스스로 지배할 준비를 하게 한다. 20세기에 모든 노동계급 반란의 2중 권력 평의회(혹은 소비에트)가 이런 충동을 확인해 준다. 이것이 바로 혁명적 맑스주의의 특징인 낙관론의 근거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혁명적 신뢰의 결여는, 맑스주의적인 것처럼 가장한 모든 제3의 체제론이 선택한 분석의 핵심이다. 제3의 체제론자들이(그리고 국가자본주의론자들과 노동자 국가론자들)이 제시하는 스탈린주의에 저항하는 강령 - "혁명적 민주주의" - 은 사실상 혁명적이지 않다. 그 강령은 억압에 대해서는 일부나마 해답이 되겠으나 착취에 대해서는 전혀 해답이 되지 않는다. 그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 영웅적 희생자들 또는 조종할 수 있는 희생자들로 구성되었다는 믿음에 이바지한다. 그런 분석은 스탈린주의뿐만 아니라 평범한 자본주의와도 관계있는 명백한 냉소주의와 손잡고 가는 것이다.

중간계급 맑스주의

노동계급의 혁명적 능력에 대한 패배주의적 태도는 19세기 자본주의에 나타난 "새로운 중간계급"의 사회 전망을 보여주는 일종의 질병이다. 이것은 단순히 오늘날 좌파가 대체로 중간계급 출신(사실이지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중간계급이든 아니든 그들이 중간계급의 세계관을 지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 전통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쁘띠부르주아 소상인처럼, 중간계급은 자본가들 사이의 살인적 투쟁을 최고인 것으로 보고 있다. 또는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진 인텔리겐챠처럼, 중간계급은 사회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강력한 세력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보았고 국가를 두 개의 중요한 계급과 별개로 그들 자신의 권력 중심으로서 통제하고자 했다.

중간계급 맑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부패시키는 비열한 물질적 동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필요한 것은 낡은 탐욕과 물질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사회주의적 남성"과 여성이다. 분명히 자본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역시 근근이 살아가느라고 그들 사이에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대체로 적격자들이 아니다. 사회주의에는 선진적이며 사회의식이 있는 사람들 - 기획자들, 과학자들, 이론가들 등 - 요컨대 경제적으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중간계급이 필요하다. 맑스주의가 중간계급 좌파에 의해서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사상, 즉 추측컨대 레닌으로부터 파생된 사상이 이러한 견해와 관련되었다(그렇지 않음을 제2장에서 확인하시오). 사회주의에 대한 중간계급의 맑스주의적 해석은 문화적으로 뒤진 사람들을 위해서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통치하는 사회다.

물론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상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계급적 뿌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적 과제로서 자신들의 강령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소기업이 지배하는 신화적 세계를 결코 원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대체로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민주주의이다. 그 사회에서 노동자들 또는 "민중"의 통제를 받는 대중 제도들의 견제력을 통해서 안정이 이룩된다. 중간계급은 그들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트러스트를 해체하기(trust-busting) 또는 분권화로써 독점과 싸우는 자유주의자들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양측 모두 국지적 통제 - 또는 그것의 노동자주의적 형태인 작업장 통제 -를 촉구하며 거대한 괴물과 같은 국가권력에 민주주의를 대치시키고자 한다.

이런 관점의 피상적 성격은 혁명기에 분명히 드러난다. 혁명기에 중간계급 좌파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휘두를 수 있는 거대한 권력에 부딪쳐서 끝내는 구시대 통치자들의 권위에 호소하게 된다. 그래서 1917년 러시아의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편들었고 1919년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을 위해서 노동자들을 박살내버렸으며, 1968년 프랑스 공산당은 드골의 결사적인 방어세력임을 증명했다. 심지어 1936년 스페인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합세하기까지 했다.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반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끝내 반 노동계급적 국가기구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예전에 트로츠키가 관찰했듯이, 자칭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변증법적 발전을 무시한다는 것이 변증법이 그들을 무시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자본주의의 위기가 다시 생겨나면서 진정한 공산주의가 절박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강력하게 전 세계에 걸쳐서 그 존재를 느끼도록 해왔다. 그것에 대응해서 중간계급 좌파는 노동자들의 반란성에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하지만 중간계급은 우회적으로 계급적 독립에 대한 시도에 너무 열중한 탓에 사회민주주의나 스탈린주의로 잘못 인도하는 지도자들에 목매왔다. 여러 가지 실례들이 있다. 즉, 폴란드에서 좌파 보좌진은 1980년-1981년 혁명을 "스스로 제한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 좌파는 노동당이 1984-1985년 광부들의 파업을 매장시켜버리는 일을 돕고 있다고 폭로하는 대신, 노동당에 훨씬 더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팠다. 미국에서는 제시 잭슨이 눈치 빠르게 대중의 불만을 느끼고 선동가답게 그러한 불만을 자본주의적 민주당의 틀 내에 가두고자 애썼을 때, 좌파는 두 번이나 선거운동에 열렬히 협력함으로써 함정에 빠졌다.

제3세계에서도 좌파의 노력이 치명적이었다. 칠레에서 좌파는 부르주아 군사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아옌데 정권의 인민전선과 프롤레타리아트가 관계를 끊으려는 것을 방해하는 일을 도왔다. 이란에서 좌파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공화국이 제국주의와의 투쟁에 필요한 한 단계임을 노동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도구였다. 사실 좌파는 준 파시스트적 패배로 직행했다. 니카라과에서 좌파 산디니스타는 미 제국주의의 비위를 맞추려는, 헛되고 파멸적인 시도를 하느라고 노동자-농민의 반자본주의 투쟁을 막았다.

맑스주의를 다시 활성화하려면, 우리는 공산주의가 하나의 이상향이고 노동계급에게는 혁명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맥 빠지게 하는 사상을 잠재워야 한다. 그 사상은 전후 제국주의가 부활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충격이 완화되었으나 이제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위기와 계급적 힘의 압력을 느끼면서 겁에 질린 중간계급에 의한 질서요구의 외침일 뿐이다.

(역자 : 최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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