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오늘날 공산주의의 유령은 세계를 배회하지 않는다. 우리의 행성을 가로질러,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자 계급은 살인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 지배에 맞서 되풀이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혁명적 노동자 국가의 수립으로도 귀결되지 못했다.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중간계급과 관료주의의 “거들먹거리는 구세주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문제의 큰 일부였을 뿐 해답이 아니었다. 우리 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던 것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지도부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4인터내셔널을 위한 공산주의자 조직>(COFI)은 계급의식적인 볼셰비키 지도부의 부활을 위해 투쟁한다. <COFI>는 진정한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의 부활을 위해 싸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세계 사회주의 혁명 정당인 제4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위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전위 층들을 조직하고 교육을 도우려고 애쓴다.
노동자 계급은 투쟁의 과정 속에서 배우는 교훈들을 통하여 사회주의 의식을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가장 선진적인 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들은 [국가권력을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핵심수단인] 그들 자신의 공산주의 전위 정당을 건설하도록 계급투쟁에 의해 인도된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스스로 맑스주의자라 내세우는 중간계급 경향들과 달리,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 즉 맑스, 엥겔스, (1905년 이후의) 레닌, 트로츠키가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살아있는 세계관을 고수한다.
진정한 공산주의의 깃발 아래서, 우리의 지배계급들과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증오를 도전적으로 드러내면서, 우리는 이 투쟁에 우리의 삶을 바친다. <공산주의자 선언>의 정신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의 정치적 정체성을 감추기를 거부한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우리 계급에 대한 충성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강령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두 낱말로 요약될 수 있다. 속임수로는 혁명의 근거, 즉 현실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자각을 진전시킬 수 없으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관한 진실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모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자들에게 인간다움과 계급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자고 요청한다!
<COFI>의 건설은 투쟁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트로츠키가 역설한 것처럼,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지도력의 위기다. 우리 시대의 맑스주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들은 그 깃발을 견지한다고 주장하는 대다수 조직들에 의해 송두리째 파괴되고 그 반대편으로 변형되어 버렸다. 기초적인 공산주의 원칙들, 즉 노동자 계급은 유일하게 자본주의 스스로에 의해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로서 창조된다는 점, 노동자 계급의 독립성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위한 으뜸가는 필요조건이라는 점, 혁명의 당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당이며 가장 선진적이고 의식적인 성원들로 구성된다는 점, 전위정당은 국제적이고 인종을 초월해야 하며 국제주의와 인종초월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각 나라에서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점이 포기되어 왔다.
<COFI>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전술적인 것이 아니며 근본적인 것이다. 다양한 사이비 맑스주의 경향들과 우리가 갖는 차이는 계급의 차이다. 우리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에 대한 충실성을 입증한 자들이 다른 계층으로부터 우리의 대열 속으로 넘어오는 것을 환영하지만, 전위 정당은 자신의 노동계급 구성과 정치적 성격을 열성적으로 유지하면서 행동한다.
우리는 스스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주장하는 다른 조직들로부터 <COFI>를 구분하는 두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첫째, 우리는 현재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의 대중조직을 이끌고 있는 개량주의자들의 동요, 항복, 배신을 감추지 않고 폭로하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한다. 즉 우리는 항상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전진을 위해 행동한다.
둘째,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사회주의 혁명을 할 수 있다. 비노동계급 세력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즉 노동자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는 개념은 단지 스탈린주의자들만의 관점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4인터내셔널>이 실질적으로 타락하는 신호였다. 마이클 파블로와 에르네스트 만델의 지도 아래, <제4인터내셔널>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경제부흥기 동안 제국주의 국가들 내에서 부상했던 광대한 새로운 관료적 중간계급과 노동귀족들의 관점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계급협조주의를 퍼뜨리는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트로츠키는 반혁명세력으로 생각하였지만, (“기형적인 노동자 국가”를 옹호하는) 파블로주의자들은 대중투쟁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일깨워진다면 노동자 국가를 수립할 수도 있는 지나치게 제한적인 진보주의자들로 바라보았다.
진정한 맑스주의를 포기한 것은 어떤 사악한 음모의 결과가 아니라 계급적 성격을 배신한 결과였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고립은 처음에 노동귀족 층에 뿌리를 둔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반혁명 시도들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노동자 혁명이 본질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스탈린주의 관료체제가 성장하고, 나아가 1930년대 후반 피로 물들인 숙청의 물결 속에서 반혁명 세력이 소련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숙청을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선 “예방 내전”이라고 보았지만, 빠르게 타락한 노동자 국가가 마침내 전복되었다고는 믿지 않았다.
1939년에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매우 타락하고 모순적이며 거의 죽기 직전이라고 믿었으며, 그래서 그 성격을 “반혁명적인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지었다. 여전히 “속이 빈” 그리고 “허약한” 노동자 국가라는 잘못된 믿음에 뿌리를 둔 트로츠키의 예견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은 스탈린주의의 붕괴가 아니라 오히려 그 확장으로 귀결되었다. 처음부터 동유럽의 노동자 봉기들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분쇄되었다. 새로운 인민전선주의의 “인민 민주주의 국가”가 노동계급 혁명에 의해 수립된 경우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4인터내셔널>은 동유럽의 새 정권들이 국가자본주의라고 처음에 이해했지만, 1940년대 후반에 가자 “기형적인 노동자 국가”라고 결론 내렸다.
스탈린의 지배 아래서, <제3인터내셔널>의 다양한 정당들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국제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중간 계층과 노동귀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함께 스탈린주의자들은 인민주의, 즉 전체로서의 “인민”이 계급적 차이에 관계없이 인류 진보의 근거를 진전시킬 수 있고 파시즘과 더 많은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개념이 확산되는 데 일조했다.
불가피하게 이것은 부르주아 개혁 정치인들을 “광범한” 사회운동의 지도자로 그리고 선거에서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합작하는 부르주아 정당들의 이해관계에 종속시켰다. 그것은 한 때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전반에 넓게 퍼졌던 너무나 소중한 계급의식을 오랜 시간 손상시켰다. 그것은 국제주의 대신에 민족주의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고유한 강령 아래 피억압계층 속에서 나머지 동맹세력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개념을 서서히 파괴했다.
그래서 인민주의는 노동계급의 패배, 대중운동에 대한 배신, 파시즘의 승리, 제국주의 세계전쟁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자본주의에 휴머니스트의 얼굴 씌워주기를 뒷받침하고 시도하면서, 인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추악한 제국주의의 영광 속에서 유지되도록 하는 데 봉사했다.
1950년대 제국주의 국가에서 개량주의 정당들이 공공연한 계급협조를 향해 오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파블로주의, 샤흐트만주의, 클리프주의 등 트로츠키의 모든 다양한 아류들이 스탈린주의 정당 그리고/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깊숙하게 들어갈” 것을 주장했다. 그들을 분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진하도록 재촉하기 위하여.
1952년에 이르러 <제4인터내셔널> 속에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흔적은 완전히 질적으로 소멸되었다. 1950년대 초기 볼리비아 혁명에서, 그 나라에 있던 <제4인터내셔널>의 중요한 지부가 부르주아 좌파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했다. 그러한 배신은 혁명의 분쇄를 도왔으며, <제4인터내셔널> 내부의 어떤 중요한 세력도 이처럼 철저한 투항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혁명적 중심으로서의 <제4인터내셔널>은 끝났음을 뜻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다양한 아류들이 분열되어 나갔는데, 이들은 흔히 중간계급이 이끄는 농민 게릴라주의, 학생 전위주의, 선거 개량주의를 지지했다. 무수한 분리파들은 대부분 볼리비아 배신 직후에 출현하였는데, 그들 모두는 개량주의 또는 중도파 투항주의의 오점을 보여주었다.
개량주의 정당들은 하나같이 [스탈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모두]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주요한 버팀목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구석을 뒤흔들었던 프롤레타리아의 거대한 용솟음을 통제하고 붙잡아매고 호도할 능력이 없다는 점 때문에 노동자 계급 내부에서 그들에 대한 지지가 명백하게 붕괴되었다. 그로부터 스탈린주의 블록은 붕괴되어 왔으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당들은 이전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위축되었다. 사회민주당들과 노동당들은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오른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어왔다.
오늘날, 그러한 위기의 충격 아래서, 다수의 좌파 개량주의와 중도 사이비 맑스주의 집단들이 전통적인 개량주의자들이 버리고 간 진공을 메우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어떤 자들은 트로츠키주의의 겉모습과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대한 추구마저 포기했으며, 전통적인 중도좌파 개량주의의 좌파 대열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다른 자들은 과거의 당을 대체하는 새로운 [아마도 흠집 없는] 좌파 개량주의 당과 동맹의 출범을 추구한다. 개량주의로 가는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들은 “녹색”이나 다른 급진 부르주아 개량주의와 함께 하는 계급 협조적 인민주의와 인민전선 블록을 촉진하기 위하여 그들의 새로운 정식을 사용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당들이 사실상 넘겨준 자본주의 체제의 좌파 방어자로서의 역할을, 그 반대자인 척 하면서 수행해 오고 있다.
<COFI>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주의의 부활을 추구한다. 우리는 오늘날 “정통”을 구성하는 부르주아적 해석에 맞서 진정한 맑스주의의 복원을 위해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헐뜯는 중간계급 맑스주의자들에 맞서 흔들림 없는 투쟁을 맹세한다.
자본주의 위기가 이제 전 세계에 걸쳐 중간계층과 노동귀족을 약화시키고 해체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개량을 양보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능력이 엄청나게 줄어들어 왔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계급 협조적 개량주의의 역할은 점점 더 제한되어 왔다. 위기가 깊어지면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상승하면서, 중도주의 세력들이 양극화될 것이며, 진정한 노동계급의 전망을 추구하는 부분들이 모아져 수렁 속에서 출현할 것이라고 우리는 예상한다. <COFI>는 조직적 또는 정치적 분파주의를 결코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인간다움을 향한 투쟁 속에서 전 세계의 모든 진지한 공산주의 세력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단결할 것이라고 스스로 맹세한다.
우리는 세계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1990년에 우리는 <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이라는 우리의 책을 통해 두 번의 세계전쟁, 대공황,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로 점철된 20세기 전반부를 오늘날과 대조했다.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아직도 쇠퇴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모른다. (…) 비록 2차 대전 이후의 경제부흥이 끝났고 심각한 위기의 가능성이 이제 공공연하게 서구 부르주아들 내부에서 거론되고 있지만 지배적인 관점은 (…) 자본주의가 성공적이라는 것이다. 동구 ‘사회주의’ 정권들의 붕괴는 그 근거를 제공한다.” (243쪽)
불과 몇 년이 지나자, 겉모습이 현실에 부합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승리” 이후에 미국이 이끄는 안정된 ‘새로운 세계 질서’라는 상상은 이제 단지 비웃음만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운 질서는 안정과는 전혀 무관하다. 세계 경제는 몇 년간의 제로 성장이라는 고통을 앓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제 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그 1/3 이상이 실업 상태에 있다. 국가 간의 빈부격차와 국가 내부의 빈부격차는 어느 때보다 벌어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 미국 안에서조차 노동자들의 2/3가 “건강, 능력발휘, 어린이 양육, 공동체 활동 참여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공식적으로 기술된 기준선 또는 그 아래에서 살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본주의 스스로가 존재하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상품, 즉 노동력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중이다.
계급 지배를 위한 모든 정당성이 산산조각 날수록, 자본주의 지배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이든 다 할 것임을 보여준다. 어제는 르완다에서 대량 살육을 하고 오늘은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대학살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중동, 아프리카, 이전 유고슬라비아 지역,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악한 민족주의 전쟁의 극단적인 사례들일 뿐이다. 모든 대륙에서 그들의 고향을 탈출하는 망명자들의 물결이 주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테러라는 반동적인 형태는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약탈을 중단시키려고 의도되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서구 “선진” 자본주의 권력들에 의한 테러 캠페인들을 가속시키고 훨씬 더 효과적이게 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해답을 전혀 제공해 주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존재에겐 정말로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야만의 형태를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꿀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겐 가능성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집을 가질 수 있는 삶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지점까지 생산력이 이르렀다. 나머지 계급들을 억누르는 한 계급의 지배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세계는 진정한 사회주의와 점점 더 분명해지는 야만 사이의 선택 앞에 명확하게 놓여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외에 다른 대안은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세계 좌파의 대부분은 여전히 부르주아 “현실주의”, 즉 인민주의, 선거주의, “민주주의”, “진보적” 민족주의에 헌신하고 있다. 그리고 맑스주의인 척 하는 부패하고 염증나는 교리에도.
혁명적 변화를 바라는 의식은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놓고 보자면 혁명에 대한 지침으로서 맑스주의에 대한 존중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가장 낮은 수준에 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COFI>는 인간다움을 향한 모든 희망이 걸려 있는 진정한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을 한층 더 복원하고 다시 다듬는 것을 우리의 과제로 삼는다.
맑스주의 변증법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과거의 개념들을 한층 더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세계와 그 내부의 모든 현상들은 늘 변화한다. 그러므로 맑스주의의 이해 자체도 그와 같이 발전되어야 한다.
계급 사회의 가장 진전된 형태인 자본주의는 임노동을 통하여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요한 두 계급인 부르주아지(자본가들)와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들)는 생산양식에 근본적이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서 있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계급들은 개인들의 집합이지만 상대방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는 생산지점에서의 착취이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통제하는 데서 이전의 어떤 사회보다도 훨씬 멀리 나아갔지만, 자신의 고유한 사회적 관계들을 통제하는 데서는 가장 낮은 능력을 갖고 있다. 지배계급은 적대적이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대결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 내부 관계에서도 자본가들은 사적 자본의 소유자로서만 서로 마주친다. 그들 사이에는 무정부 상태가 지배한다. 그러므로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은 오로지 체제의 눈먼 법칙들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낸다.
부르주아지는 거대한 자산을 소유한 계급이지만 다른 자들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로 기생한다. 부르주아지는 대다수 생산수단과 금융의 소유자들로 집중된다. 부르주아지는 2백 년 동안 가장 발전된 국가들에서 지배계급이었으며, 20세기를 거치며 세계를 확고히 지배하게 되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는 이러저러한 형태로 모든 곳을 지배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중요한 자산도 갖지 못하고, 그래서 임금을 얻기 위해 노동력을 팔아 살아가도록 강요당하며, 생존을 위해 부르주아지와 일상적인 투쟁에 나서도록 강요당하는 모든 자들의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잉여가치 생산에 핵심적인 산업과 운송에서의 거대한 노동자 군대로 집중된다. 체제 자체가 협동적인 노동형태와 생산의 사회적 조직화를 통하여 현대의 노동자 계급을 발전시켜 왔으며, 잉여가치를 둘러싼 지배계급과의 투쟁 속에서 그들을 준비시켜 왔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들, 즉 자신의 객관적인 이해관계가 흉악한 세계 대신 협동하는 세계를 성취하는 것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계급에게 의존하면서 그들을 창조해 왔다.
쁘띠 부르주아지는 작은 자산의 소유자들로 구성된다. 그들은 주로 스스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며 만약에 있다면 아주 적은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많은 나라들에서 쁘띠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부분은 농민들이다. 이 계급 또한 부르주아지에 의해 착취당하는데, 부르주아지는 쁘띠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는 잉여가치의 상당 부분을 제 것으로 만든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중간계급”, 즉 전문가들, 관리자들, 학자들 등 봉급을 받거나 스스로 고용된 계층들이 위치한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통제하고 매수하기 위해 쇠퇴의 시대에 자본주의에 의해 엄청나게 확장된 계층들이다. 이 계층들은 한쪽 끝에서는 노동자 계급과 서로 침투하고 다른 쪽 끝에서는 보다 위의 쁘띠 부르주아지나 부르주아지와 서로 침투한다.
한 때 진보적일 때, 자본주의는 계급 사회와 착취가 더 이상 불필요한 지점까지 생산력을 무지막지하게 발전시켜 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마지막 계급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존속되는 한, 세계 체제로서 자본주의는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이다.
쇠퇴의 시대에, 생산의 집적과 집중을 향한 자본주의의 경향은 독점화의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유기적인 생산력 발전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으며,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국제적인 공황을 심각하게 발생시키며, 그러한 공황은 체제가 존속하는 한 불가피하게 더욱 악화된다. 공황은 지연될 수 있지만, 그럴수록 일단 폭발하면 훨씬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
독점은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와 한 쌍이다. 제국주의에 의존하며 자체적인 자본주의 발달이 종속되어 있는 더 약한 나라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권력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역사적인 발전 속에서 자본은 자신에게 적합한 정치적 수단, 즉 민족국가를 만들어 냈다. 부르주아 국가는 무력의 독점을 통하여 부르주아지의 본질적인 사무들, 즉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계급적 갈등과 다른 부르주아 세력들과의 국제적 갈등을 처리하려고 고안된 지배계급의 도구이다. 국가는 자신의 국경 내부에서 자본의 형성과 발전을 촉진하고 보호하는 데 복무한다.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에, 이제 생산수단이 국제적이며 빈번하게 국가적 한계들과 충돌하기 때문에, 민족국가의 경제적 유용성은 사라졌다. 하지만 경쟁하는 자본가들에 맞서 투쟁하고 노동자 계급을 분할하는 양 측면의 수단으로서 민족국가의 정치적 필요성은 자본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자본가들의 평화로운 국제적 단결을 향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체제다.
오로지 지배적인 또는 정복한 국가권력들의 헤게모니 아래서만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 일시적인 단결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제는 한편으로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을 향해, 다른 한편으로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나라들의 방어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향해 나아가도록 내몰린다.
경쟁하는 자본들 간의 전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과 조직화는 잉여가치의 상당 부분을 생산적인 축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정과 억압을 위해 사용하도록 지배계급에게 강요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지배계급 내부의 강화되는 경쟁을 제어하기 위하여 그리고 대중들을 통제하고 매수하기 위하여 국가 기구를 엄청나게 확장한다.
실업자 예비군은 거대한 비율로 성장해 왔으며,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이제 국제적인 기반 위에서 임금을 삭감하려고 실업이라는 협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계급투쟁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거나 계급투쟁을 억압하기 위하여 민족주의와 군사화를 강화한다. 급진적인 “반(反)자본주의”를 내걸고 쁘띠 부르주아, 룸펜 프롤레타리아, 노동귀족들을 결집시키는 파시즘은, 그러나 실제로는 반(反)노동계급 프로그램이며, 불안정한 국가의 자본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수단이다. 파시즘은 인종주의, 민족적 국수주의, 전쟁으로 나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타고난 경향들을 촉진한다. 만일 사회주의 혁명으로 그것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격화되는 위기는 반드시 핵심적인 국가들에서 파시즘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만일 혁명이 그것을 때맞춰 저지하지 못한다면, 제국주의 국가권력들 사이에 가득 차 있는 지금의 긴장들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할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분할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사회적 분할을 심화시킨다.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가족제도와 피착취노동의 “이중 부담”을 통해 여성에 대한 전(前)자본주의적 억압을 확장해 왔다. 자본주의는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라는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고안해 냈다. 자본주의 자체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고 잔인한 무리들이 반(反)유대주의라는 아주 낡은 무기를 소생시켜 왔다. 오늘날 제국주의는 또한 반(反)아랍주의와 모든 배경을 가진 무슬림들에 대한 반동적인 국수주의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촉진하고 있다. 때때로 가장 가혹했던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억압은 가족을 신성한 것으로 유지해야 할 자본주의의 필요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
인종주의는 원래 갓 태어난 자본주의가 서구의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냈던 것인데, “제3세계”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를 수립하고 방어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노동자 계급의 일부 계층에 대한 초과착취는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임금을 삭감시킨다. 오늘날 인종주의는 [심지어 집단학살을 부추기면서까지] 전 세계적으로 죽어가는 자본주의를 지키는 주요한 보루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요구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민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훨씬 더 독립적으로 되어 왔다. 하지만 제국주의가 양산한 반(反)이민 국수주의가 인종주의와 결합하면서 노동자 계급을 분할하는 수단으로 갈수록 심하게 사용되어 왔다.
이제 위기가 너무 깊어서 강력한 미국 경제마저 세계의 나머지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적 재앙으로부터 과거와 달리 이익을 얻지 못한다. 1930년대 규모의 또는 더 큰 규모의 대공황이 1년 후에, 또는 2년 후에, 또는 그 이후에 덮칠 것인지 우리는 예언할 수 없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위험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버둥거리고 있다.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끔찍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미 지구를 괴롭히는 자들을 엄청나게 위축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미국 자본가들의 계략에 놀아난] 9·11 테러의 결과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공격이 머뭇거리면서도 잔인하게 가속되어 왔다. 반(反)테러주의의 포장 아래서, 워싱턴이 이끄는 제국주의 지배계급들은 전 세계의 반항적인 대중들과 제국주의의 암묵적인 볼모들이 공포에 떨게 만들 제국주의 전쟁들에 대비하여 애국적인 국수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현 시대에 만연하는 국가와 산업의 관료제는 노동자들의 조직, 즉 당과 노동조합 속에 자신의 상대역을 갖고 있다. 제국주의는 노동자 계급 내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이해관계를 가진 계층을 발전시킨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 내부에서 가장 높은 임금을 받고 가장 안전한 노동자들인 그들은 “노동귀족”이다.
노동귀족에 기반을 두고 노동 관료제가 존재한다. 노동관료들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알선하는 브로커로서 자본주의에 봉사한다. 그들의 계급적 본질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쁘띠 부르주아이다. 노동관료의 존재는 자본주의의 생존과 [자본주의의 생존에 노동자들을 묶어두기 위하여 노동자들에게 떡고물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인 개량 양자에 의존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노동귀족과 노동관료는 중간계급과 쁘띠 부르주아의 노동자 계급 속으로의 상호침투를 반영한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수정주의로 불리는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량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압력으로부터 성취될 수 있다는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어차피 자본주의의 발전과 현대화라는 전형적인 결과가 될 것이었다.
번영의 시대에 개량주의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노동자 계급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제한된 개량을 추구했다. 오늘날 개량주의는 기본적으로 지난날의 떡고물들을 줄이는 쪽을 지지한다. 미래에 노동자들의 봉기가 배반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개량주의자들의 일부는 다시 한 번 떡고물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위기와 계급 양극화의 상황에서, 개량주의의 주창자들은 스스로 부르주아 세력들과 공공연히 협력하도록 계속해서 강제 당하며, 이제 개량에 대해 재잘거리는 것을 중단했다. 전통적인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이것을 뻔뻔스럽게 했다. 보다 좌파적인 부분들은 계속해서 개량을 선전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이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강제 당하는 중이다.
오늘날 체제의 위기는 중간계급과 노동귀족을 먹어치우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의 하위 계층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들 계층의 개인들과 부분들은 체제의 위기 자체로 인해 어느 계급의 형성에 그들의 충성을 바쳐야 하는지를 재정리하게 될 것이다.
소련에서 반혁명의 승리를 통해, 관료세력은 국가화된 자본주의 지배계급으로 전환되었다. 국가소유를 유지하도록 강제당하면서, 잉여가치에 기생했던 관료세력은 잉여가치 수탈에 국가를 사용했다. 그들은 사적 소유를 가진 부르주아지의 부재를 대신하여 대리통치 계급으로 복무했다.
스탈린주의 지배계급의 사회적 목표는 상대적인 폐쇄경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체제 내화를 통해 그 민족 자본을 방어하고 확장하는 것이었다. 일국 자본주의는 “일국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슬로건 아래 스탈린주의 지배계급이 추구한 반동적인 유토피아적 목표였다. 즉 쇠퇴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지속은 [당시에 체제를 떠받치기 위해 작동했던]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독특한 형태를 만들어 냈다.
보다 허약한 나라들, 즉 그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믿음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계급 권력을 방어할 수 없었던 나라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 심각하게 패배했던 나라들에서 제국주의를 막으려는 노력들은 엄청나게 확장된 국가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주의 소련을 모델로 한 국가들의 건설은 이것의 극단적인 경우였다. 친(親)자본주의 계급 세력들이 소유를 국가화 하는 것은 오로지 먼저 프롤레타리아트를 패퇴시키고 무력화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것은 영구혁명론의 타당성을 역으로 보여주는 근거이자 영구혁명론의 확장이다.
식민지와 반식민지들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터져 나왔던 혁명들을 부르주아 단계 수준으로 제한하려는 입장에 항상 서 있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들은 노동자들이 계급 협조와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려고 일했다. 즉 제국주의 세계시장으로부터 단절할 수 없었기에 스탈린주의자들은 오늘날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신식민지주의로 가는 길을 닦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체로 스탈린주의가 발전한 곳은 전통적인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그 지배력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폭발적인 대중들을 억누를 수 없는 그런 지역들이었다. 주로 불균등 결합 발전이 이루어진 나라들, 즉 위험한 노동자 계급이 과거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과 결합된 특징을 띠는 나라들에서, 스탈린주의는 자본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테러와 양보라는 두 가지 수단을 사용했다. 심지어 반혁명 이후에도 소련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국유화, 완전고용 등 10월 혁명의 일부 성과물들을 유지하도록 강제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출현한 다른 나라의 스탈린주의 정부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그리고 노동자들을 억누르기 위하여 비슷한 수단들을 채택해야만 했다.
스탈린주의 방식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을 뿐이었다. 잔존하는 노동자들의 성과물 때문에 질척거리면서,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 냈으며, 그러한 자본주의는 경제위기를 해소함으로써 영구적으로 작동하는 체제가 될 수 없었다. “계획”이라는 겉포장 밑에 있는 실제 경제는 무정부적인 아수라장이었다. 착취를 강화하고 과거의 성과물들을 제거하려고 시도할수록 지배계급은 점점 더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스탈린주의의 보다 부르주아적인 방식을 향한 변화와 최종적인 붕괴로 귀결되었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반혁명적인 장애물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반혁명적인 장애물이다. 소련은 국내의 감옥에 가둔 민족들과 정복한 위성국가들을 종속시킨 독자적인 제국주의였다. 반(反)제국주의라는 그들의 자기규정 그리고 서방과의 실질적인 경쟁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세계 제국주의를 위한 버팀목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 세계구조의 취약한 지역에서 대중들을 억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소련에 맞서 냉전을 치르는 동안, 모든 나라의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이 찾을 수 있는 모든 “평화적이고 진보적인 집단들”과 협력하는 것을 추구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심화는 곧 쓰러질 것 같던 스탈린주의 경제들을 더욱 약화시켰다. 노동자 계급의 반란은 정권들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혁명 정당들이 부재한 가운데, 봉기는 사적 소유 부르주아들이 되는 과정에 있던 관료들에 의해 탈취되었다. 스탈린주의는 죽었다. 하지만 그 전에 스탈린주의는 반세기 이상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생산력의 전면적인 발전, 모두를 위한 풍요로움의 성취, 인간다움과 인류문화의 만개는 공산주의, 즉 계급 없는 사회의 수립을 요구한다. 공산주의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적인 사회변혁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러한 변혁은 노동자 국가들(프롤레타리아 독재들) 아래 이행기 사회들을 통해서 성취된다. 노동자 국가의 과제는, 생산력(특히 노동자 계급 자신)을 발전시키고 대중의식에 진정으로 기초한 집중된 계획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자본주의의 계급적 분할과 억압, 경제적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다. 노동자 국가 아래서의 계획은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적 유용성을 위해 더욱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기술과 기계는 더 이상 낮은 임금과 실업을 의미하지 않으며, 모두를 위한 보다 큰 풍요와 노동시간의 단축을 의미한다. 축적이 확대됨에 따라, 자본주의 계급 사회를 움직였던 결핍이라는 낡은 맹목적인 법칙이 자원들의 할당과 새로 출현하는 사회 자체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독자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라져가는 것처럼 노동자 국가도 사그라져 간다.
노동자 국가는 소비에트나 노동자 평의회처럼 대중기반 제도들을 통해 실행되는 노동자 계급 자신의 실질적인 지배에 기초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필요로 한다. 노동자 평의회는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당이 민주적으로 이끌고 가는 한 혁명적인 것이 되며 그렇게 유지된다. 노동자들이 의식적으로 전진할수록,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향한 변혁은 어느 때보다 더 단호하게 된다.
노동자 국가는 오로지 그러한 국가들의 국제적인 연맹의 일부일 때에만 성공적으로 자신을 유지하고 풍요를 창조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한, 노동자 국가는 해악을 퍼뜨리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중심이 또한 되어야 한다. “일국 사회주의”는 불가능한 목표이며 자멸하는 전략이다.
노동자 국가는 오로지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수립될 수 있다. 우리는 노동자 혁명으로 수립되지 않은 국가를 “기형적인 노동자 국가”라고 부르는 이론을 거부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평화적인 이행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국가는 무장한 노동자들의 봉기를 통해 분쇄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전위 정당이 이끌어야 한다. 전위 정당이 지도적 역할을 하지만, 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 등 노동자 통일전선의 가장 높은 형태들은 국가권력의 혁명적인 장악을 위한 기관으로 활동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의 “자발적인 행동들”, 즉 조직된 지도부가 없고 뚜렷한 정치세력들의 통제가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 행동들은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갖는다. 사실 선진적인 의식의 성장은 그러한 예비적인 투쟁들 속에서 배우는 교훈들의 결과로서 발생한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들을 비(非)혁명적 의식이 지배하는 한, 즉 의식적인 노동자 계급 전위가 이끌지 않는 한, 그러한 투쟁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취할 수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또는 어떤 더 진전된 자본주의를 위한 “계급혼합” 또는 “비(非)계급” 단계가 필요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노동자 계급은 농민이나 하급 중산층 같은 다른 계급들과 계급 요소들을 국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혁명적 동맹 속에서 이끌려고 추구해야 한다.
현 시대에 프롤레타리아트가 강력한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한 상황에서, 부르주아지는 극히 반동적인 전(前)자본주의 계급들의 잔존물들과 동맹하도록 강제된다. 제국주의는 자신의 지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반동적인 반(反) “부르주아 민주주의” 수단들에 철저히 의지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번영하는 시대에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또는 그 졸개들의 무장력을 민주적인 껍질 속에 될 수 있는 한 감추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위기 속에서 주먹은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이다. 하지만 현 시대에, 위기의 수준이 어떠하든 부르주아 혁명의 잔존하는 민주적 과제들은 오로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노동자 계급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성취될 수 있다. 즉 민주주의 “혁명”은 이제 사회주의 혁명의 부산물이지, 사회주의 혁명에 앞서는 불가피한 단계가 아니다. 이것이 영구혁명론이다.
자본이 국제적이며 생존하기 위해 서로 죽이는 민족주의에 의존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드시 국제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노동자 국가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발전해 나갈 수 있으려면, 한 나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특히 지배적이고 경제적으로 앞서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반드시 확산되어야 한다.
혁명적 전위 정당은 노동자 계급 가운데 가장 선진적인 계급의식을 가진 층을 대표한다. 노동자 계급은 다른 모든 계급들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레닌과 트로츠키는 전위 정당이 오로지 한 계급의 당이며 자신의 활동을 노동자 계급 내부에 집중한다는 점을 정확하게 강조했다. 각 나라에서의 전위 정당은 재건될 진정한 제4인터내셔널, 즉 세계 사회주의 혁명 정당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인터내셔널과 그 당들은 민주집중제에 입각하여 투쟁하는 조직들로서, 내부 민주주의와 결합된 엄격하고 기율 있는 행동통일을 구현한다. 당과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다수파의 기본적 권리는 그 정책들이 당 정책으로 수행된다는 점이다. 소수파의 기본적 권리는 그 관점들이 당 내부에서 경청되고 숙고된다는 점이며 또한 그들이 지도적인 당 기구들 속에서 적절하게 대표된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적인 과제는 전위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드러나는 전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계급 내부의 다양한 층들을 구별해 낼 것을 요구한다. 대중적인 혁명 정당이라 하더라도 파멸적인 결과에 빠지지 않으면서 광범한 노동자 대중을 이끌기 위해서는 선진적인 층이라는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는 점을 레닌주의자들은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인터내셔널은 항상 필요하며, 그것을 건설하는 것은 모든 시대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최우선 과제다. 인터내셔널은 각 나라에서 당들을 건설하는 과정의 우연적인 결과물이 아니며, 그것은 위장된 민족주의 연방제 전략이다. 인터내셔널의 건설은 나라 단위 부분을 건설하는 것과 밀접하게 병행되어 이루어져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국제 당의 노동자 계급적인 본질이 그 강령과 구성 모두에서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인터내셔널은 맑스주의, 레닌주의, 그리고 트로츠키주의다.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동맹>과 <제1인터내셔널>, <제2인터내셔널>과 1900년 이후 레닌과 룩셈부르크가 이끈 그 혁명적 좌파, 러시아 혁명과 레닌과 트로츠키의 <제3인터내셔널>, <좌익 반대파>와 <국제 공산주의자 동맹> 그리고 <제4인터내셔널>, <제4인터내셔널> 내 중간계급 영향들에 맞서 트로츠키가 주도한 투쟁을 우리의 유산으로 삼는다.
오늘날 혁명적 기치는 당 이전의 선전 집단에 의해 [현재로서는 <COFI>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제4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추구하면서, <COFI>는 민주집중제의 정신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은 전면적인 민주집중제를 혼자서 실현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가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을 부활시킨 것은 1972~73년에 미국의 <국제 사회주의자>(IS) 그룹 내부에서의 투쟁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 투쟁은 1973년 <혁명적 사회주의자 동맹>(RSL), 1976년 <혁명정당 추진동맹>(LRP)의 건설로 이어졌다.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의 초반 네 차례 대회가 남긴 주요한 교훈들, <공산주의 좌익 반대파>와 <제4인터내셔널>의 문서들과 투쟁들로부터 우리의 관점을 발전시켜 왔다. 그로부터 <COFI>가 이룬 성과들은 미국의 <혁명정당 추진동맹> 대회 문서들, 우리의 책 <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 잡지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리고 호주와 독일의 동지들이 발간한 다른 문서들과 출판물들 속의 정치적 요지로 구현되어 있다.
모든 이론을 검증하는 것은 실천이다. 오직 사회주의 혁명의 최종적 승리와 공산주의로의 성공적인 이행만이 진정한 맑스주의의 완전한 입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론의 적합성을 검증하는 하나의 간접적인 기준은 세계의 실제 사건들에서 입증된 그 이론의 예견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 <COFI>로 구현된 정치적 경향은 그러한 검증을 우리가 아는 한 지구상의 다른 어떤 경향도 다가서지 못한 수준으로 성공적으로 통과해 왔다.
1970년대 후반 “트로츠키주의” 좌파의 다양한 그룹들이 소련을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미래의 물결이요 서구 자본주의의 강력하게 계획된 대안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소련의 허약함을 지적했다. 샤흐트만주의의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은 역동적인 스탈린주의가 죽어가는 자본주의 위에서 사회주의와 대결하는 것으로 바라보았다. 클리프주의 이론은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최후이자 최고의 단계로서 제국주의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파블로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를 자본주의보다 경제적으로 멀리 나아간 자본주의 이후 사회라고 보았다. 우리는 스탈린주의가 땜질한 무정부적이고 낭비적인 유형의 자본주의로서 곧 붕괴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급격하게 저하되는 이윤율을 밀어 올리기 위하여 전통적인 자본주의 시장 형태의 방향으로 옮겨가도록 강제당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였다.
냉전의 정점에서 여러 아류들이 미래의 제3차 세계대전이 소련과 서방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한결같게 예견하고 있을 때, 우리는 소련이 군사적으로 강하긴 하지만 세계무대에서 서구 제국주의와 경쟁하는 것은 매우 큰 경제적 재앙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두 블록 사이에 실제로 경쟁이 있었지만, 스탈린주의는 근본적으로 세계 독점자본주의의 존속을 떠받치는 버팀목의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는 냉전이 세계전쟁 없이 끝날 가능성을 유일하게 예견했다. 또한 만일 사회주의 혁명이 그것을 막지 못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미국, 독일, 일본을 주역으로 해서 벌어질 것이며, 러시아와 중국은 보조 동맹자 그리고/또는 분쟁 지역으로 복무할 것이라는 점을 예견했다. 다가올 전쟁의 참전국들이 아직 실제로 결정되지 않았지만, 모든 진지한 관찰자들은 주요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확대되는 긴장들을 보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도전받지 않고 있는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 잉여가치 생산을 재분할하는 투쟁 속에서 독일 그리고 일본과 불가피하게 대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단정한 우리의 예견을 여전히 확신한다.
레닌은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극좌 세력들 속에서는 합리화와 사후 판단이 진지한 이론 작업에 대한 시도들을 대체해 왔다. 각 경향이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만의 교리에 매달려 있는 한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이상 실질적인 목표가 전혀 아니다. 정치적 좀비들은 볼셰비키-레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결코 재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노동자 투쟁 속에서 전위 정당의 지도력을 추구한다. 우리는 노동계급 조직들 속에 개입하려는 자본의 모든 시도들에 맞서 싸운다.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자들의 다른 성과물들은 [그들과의 협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지배계급과 그 국가에 맞선 투쟁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오늘날 노동자 대중조직들은 계급투쟁에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편드는 개량주의 관료들이 이끌고 있다. 모든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조직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억제하는 노동관료들의 역할에 맞서 경고하고 투쟁한다.
공산당, 사회민주당, 노동당은 대체로 그것을 건설했던 노동자 계급의 성과물이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스탈린주의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나라들 바깥에서] 그 정당들의 대부분은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들로 남아 있다. 그들의 독특한 모순은 그들이 여전히 과거 노동자들의 성취를 반영하면서도 그 노동계급 기층에 맞서 부르주아지에 의해 사용된다는 점이다.
개량주의 사회민주당들이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부르주아지에 대한 그들의 타고난 헌신을 실천적으로 명확히 드러낸 이후, 레닌주의자들은 그들을 반혁명 세력으로 여겨 왔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주의가 계급협조주의를 통해 스페인 혁명을 배신하자, 트로츠키는 공산당들이 철저하게 반혁명 세력이 되었다고 규정하였다.
일부 공산당, 사회민주당, 노동당에 대한 참여와 선거에서의 비판적 지지는 그들이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기층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전술이다. 이것은 노동자 대중들이 그 당들을 공공연한 부르주아 당들에 대한 확실한 대안이라고 여길 때, 그리고 그것이 그 당들의 배신을 폭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때 사용되는 전술이다. 우리는 그 당들이 선거에서 영구적인 지지를 받아야 할 노동자들의 기구라는 관점에 맞서 싸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자본가 계급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필요로 하고 원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우리 계급을 배신하려 할 것이라는 점을 동료 노동자들에게 공공연히 경고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통일전선을 위해 투쟁한다.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들과 달리, 노동조합들은 심지어 배신적인 사회민주주의자나 다른 개량주의자들이 이끌고 있을 때조차 타고난 반혁명 기구가 아니며,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없어지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인 성과물이며, 그 가입 자격이 노동자 계급에 제한된다. 노동조합이 혁명적인 기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혁명적 지도력을 얻기 위해 그리고 국가권력에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투쟁할 수 있다. 때때로 노동조합 연맹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거대한 잠재적 힘을 갖고 있는 전략적 산업들에서 아주 중요하다. 역사는 노동관료들이 노동조합 내에서 도전받고 폭로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충돌을 피하면서 쉽게 가려는 시도들이 혁명적 전위에게 끔찍한 자멸이 된다는 점을 거듭해서 입증해 왔다.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하고 노동조합이 갖는 차이는 전자가 정당의 범주에 속하는 반면 후자가 노동자 계급 통일전선의 특수한 형태라는 점에 있다. 개량주의 당으로부터 노동계급 기층을 분리시켜 낼 수 있다면 통일전선, 비판적 지지, 가입을 포함하는 많은 전술들이 혁명 정당을 건설하는 데서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의 경우에 우리의 과제는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부터 분리시켜 내는 것이 아니라 관료들을 혁명 정당의 지도력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작은 세력을 갖고도, 우리는 노동조합들 내부에서 선전 작업을 수행하고 심지어 일부 선동적 활동까지 수행한다. 그러한 경험은 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은 거만한 것이다. 혁명적 전위가 자신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몇 년에 걸쳐 신뢰를 쌓아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는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는 중간계급 경향들, 즉 중도주의와 좌파 개량주의를 통해서도 노동자 계급 속으로 침투해 왔다. 그러한 좌파들을 폭로하고 그들에 맞서 싸우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들의 동요는 의식을 파괴할 수 있다. 더욱 나쁘게, 대부분의 중도주의 그룹들이 입증해 온 것은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민중주의와 그 변종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를 위해 강력한 충격을 가하는 수단으로 깨닫지 못한 채 활용당하는 것을 그들이 추구한다는 점이다.
혁명 정당은 중간계급에게 중심적 역할을 부여하는 사이비 맑스주의 이론들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흔히 무정부적인 부르주아지와 “통제되지 않는” 노동자 계급 양자에게 적대적이다. 그들은 학자들이 운영하는 “계획” 명령 경제 속에서 지식인들과 경영자들에게 노동자들 위에 군림할 힘을 (노동자의 이름으로) 주는 “사회주의”를 발전시킨다. 그러므로 “중간계급 맑스주의” 이론들은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며 또는 단순히 추종한다.
우리는 또한 내일은 “노동자 계급을 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늘 중간계급 학생 정치에 몰두하고 있는 경향들을 꼬집어 비판한다. 실천적으로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믿는 어떤 계급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의식을 위한 전달수단일 뿐이라는 점이다. 한편 노동자 계급 학생들 사이에서의 활동은 프롤레타리아 중핵을 건설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과제다.
우리는 압제에 맞선 모든 투쟁들을 지지하되, 이것을 오로지 국제 노동자 계급의 보다 높은 이해관계에 종속시킨다. 우리는 영구혁명을 선포한다. 미완성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과제들은 오로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우리는 지배계급에 맞선 모든 투쟁들에서 노동계급이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 압제, 인종차별주의, 민족적 국수주의, 성차별주의, 종교적 근본주의, 파시즘에 맞선 투쟁을 하면서 부르주아 민중주의 세력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우리는 단호히 반대한다. 피억압 대중들의 조직은 중간계급 개량주의자들이 이끌고 있다. 그들의 말이 얼마나 전투적인가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러한 모든 세력들에 맞서는 대척점으로 프롤레타리아 지도력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여성 해방을 향한 투쟁을 방어하되, 항상 노동계급 여성들의 조건과 요구를 강조한다. 우리는 여성들이 집밖으로 나와서 임금 노동자로 일할 권리와 그들의 완전한 평등을 옹호한다. 우리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완전한 민주적 권리를 위해서도 투쟁한다.
우리는 평등과 정의를 향한 소수 인종과 소수 민족의 모든 투쟁을 방어하되, 그러한 집단들 내에서 노동계급 부분이 지도력을 갖도록 투쟁한다.
우리는 이민자들의 권리를 방어하며, 정치적 박해나 경제적 참사로부터 피신한 난민들에게 어떤 차별적인 장벽도 두지 말 것을 주장한다.
농민 대중들이 토지의 집산화보다는 분할을 요구하는 나라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농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실례를 갖고 그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그러한 요구를 지지할 것이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이다. 우리는 모든 종교적 권력집단들, 즉 일반적으로 계급 사회를 방어하기 위해서 특히 쇠퇴하는 자본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왕국에 관한 개념을 사용하는 자들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자본주의 때문에 점점 더 깊은 비참함으로 내몰리는 대중들이 종교 속에서 위안을 찾도록 이용한다. 이른바 해방 이론과 미신에 대한 그것의 지속은 종교적 파시즘과 그 미신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제국주의에 적대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세계 최강의 적인 제국주의에 맞서는 데 필수적인 투쟁을 가로막는 반동적인 장애물일 뿐이다.
하지만 종교적 박해가 때때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억압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중들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실천할 권리를 옹호한다. 종교는 투쟁 속에서 얻어지는 의식의 결과로서 점차 사라질 것이다. 현재 부상하고 있는 반(反)이슬람 반(反)유대 국수주의는 강력하게 투쟁해야 할 대상이다.
레닌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로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 압제자에 맞선 피억압 민족들의 권리를 옹호한다. 우리는 피억압 민족들의 자결권을 옹호한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군사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피억압 민족들과 민족주의 세력들에게 군사기술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이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정치적 지원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데, 그들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리를 원하는 민족들을 옹호하며, 많은 경우에 분리를 지지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민족 독립을 선택하려는 대중들과 달리 꼭 분리주의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민족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배하는 것은 피억압 노동자 대중을 획득해야 할 필요이며, 무엇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우선적인 이해관계이다.
제국주의 사이의 전쟁에서 우리는 모든 편에 맞서 싸운다. 어떤 제국주의 나라 안에서든 우리의 정책은 혁명적인 패배주의다. 우리는 평화주의를 거부하며, 노동자 계급 조직의 통제 아래 노동자들을 무장하고 훈련시키는 트로츠키의 프롤레타리아 군사 정책 전술을 갖고 참전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제국주의 국가의 민족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서의 압제를 강제로 종식시키려는 수단으로 제시하는 경제 제재나 전쟁을 포함하여 그들이 어떤 그럴듯한 위장을 하는가에 상관없이 그렇다.
우리는 제국주의 블록의 형성과 강화에 맞서 싸우며, 역으로 개별 제국주의 나라의 민족주의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은 지배적인 초강대국이며 세계 제국주의의 으뜸가는 보루다. 미국이 추락하는 세계경제에서 잉여가치의 몫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 타고난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면서, 자본주의 특유의 모두에 맞선 모두의 전쟁이 반드시 처음에는 무역전쟁을 나중에는 세 번째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전쟁은 만일 사회주의 혁명이 막아내지 못한다면 수억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것이다. 세계의 치안을 유지하고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아메리카 제국’을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피로 흠뻑 물들 세계 전쟁을 가속시킬 뿐이다.
혁명 정당은 프롤레타리아 의식과 사회주의 혁명을 진전시킨다는 우리의 목표에 부합하는 모든 전술을 사용한다. 노동계급 전위는 누가 우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특별히 우리는 항상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을 그들의 정확한 이름, 즉 반혁명적 개량주의자이며 동요하는 중도주의자라고 부른다. 우리가 구체적인 행동에서 그러한 분자들과 일시적으로 제휴하도록 강제당할 때 특히 그렇다.
우리는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 또는 스탈린주의 당에 대한 장기간의 입당 전술을 거부하며, 장기간의 통일전선도 거부한다. 그러한 두 가지 전술은 결국 전략이 됨으로써 전위 정당의 형성을 가로막게 된다.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전략으로서 선거주의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개량주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은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대중화할 기회를 잡기 위하여 부르주아 선거에 선전, 후보, 비판적 지지 전술들을 갖고 개입해야 한다. 레닌주의자들은 대중들이 그들의 의지를 실행할 진정으로 혁명적인 대안적 수단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선거에 대한 보이콧을 거부한다.
우리는 노동자 계급과 부르주아 당들 사이의 인민전선을 거부한다.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지의 그림자하고라도 정치권력을 공유할 수 없다. 부르주아 당들과 함께 정부를 구성하는 동맹을 맺는 것은 부르주아 정치로의 종속을 의미한다. 당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제3세계”에서든, 스탈린주의 국가 또는 이전에 스탈린주의를 겪었던 국가에서든, 제국주의 국가에서든 허용될 수 없다. 우리는 이른바 반(反)제국주의 통일전선이 인민전선의 변형으로서 영구혁명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에 거부한다.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전략으로서 게릴라주의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발전에 어긋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위 정당은 특별한 상황 아래서는 대중투쟁의 부속물로서 게릴라 전술을 사용할 수도 있다.
입당, 비판적 지지, 통일전선, 군사 기술적 지원은 우리의 무기고 속에 들어 있는 무기들이다. 그러한 전술들을 사용하면서, 혁명가들은 우리의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우리의 관점을 널리 알릴 권리를 갖고 행동하며, 혁명 정당을 위해 싸운다.
행동에서 우리의 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은, 제국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상대로 분할 전략을 사용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행동은 의식보다 중요하다. 대중행동은 우리의 이행적 요구들을 실행하는 데서 핵심이며, 노동자 계급의 투쟁 속에서의 단결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는 총파업 같은 특별한 대중행동을 강조해서 호소하는데,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것은 계급 지도력이 허약할 때 활력을 가져다주는 전술이기 때문이다. 총파업이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그 자체로 혁명적 반란도 아니지만, 총파업은 어느 계급이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즉 국가권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총파업을 향한 투쟁 속에서, 만일 총파업을 이끌도록 강제당한다면 산업적 전선으로 제한시키려고 시도할 관료들과 정반대로, 우리는 총파업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한다. 덧붙여 이러한 대중행동들을 호소하면서 우리는 배신적인 지도자들이 결집된 대중을 흩어지게 하려고 시도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의 계급에게 경고한다.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에 내재한 추진력이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게 될 것이지만, 노동자들은 그들이 온전히 계급의식화 되기 전에 계급의 적들과 대결한다. 노동자들은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여러 가지 자신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인식하며, 그것들을 충족시키려고 사회주의를 “기다리기”보다는 부르주아 국가로 하여금 충족시키라고 당장 요구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이냐 아니냐” 식의 최후통첩을 던질 수도 없고 봉기가 일어날 때까지 행동을 미루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혁명 정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요구하는 투쟁 속에서 계급의식 없는 노동자들과 결합하며, 현 시대에 자본주의 아래서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승리를 얼마나 획득하든 대중들의 요구에 대한 유일하게 진정한 해결책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트로츠키의 이행 강령은 대중투쟁의 시대에 투쟁하는 대중들의 의식을 진전시키는 가교로서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수학적으로 정식화된 요구들로 구성되는데, 그 요구들은 미래 노동자 국가가 내놓을 해답의 일부이면서 노동자들과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대중들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요약한 것이다. 그 요구들은 자본주의 아래서 내걸고 투쟁할 수는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투적인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당신들의 요구들이 부르주아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 국가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현실의 실천에서 입증하려고 시도하면서 그들과 나란히 투쟁할 수 있다. 이행 요구들을 내건 투쟁 속에서, 전위는 부르주아지의 적대성과 개량주의자들의 배신에 덧붙여 노동자 계급의 힘과 자본주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추진력을 보여줄 수 있다.
이행 강령은 전위 정당이 동료 노동자들에게 먼저 사회주의 혁명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지 않고도 그 요구들을 선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동 강령이다. 이것이 성공할 수 있으려면, 선진 노동자들이 혁명적인 사회주의 해결책과 전위 정당의 이행 강령 활용 방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선전을 받아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속임수도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는 계급의 나머지 부분에게 사회주의 혁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는다는 점을 공공연히 말한다. 아직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우리는 자본가들과 그 국가를 상대로 구체적인 요구를 내걸고 함께 투쟁하자고 제안한다. 투쟁은 어떤 전략이 옳은가를 보여줄 것이다. 트로츠키가 역설했듯이, 요구들의 ‘이행 강령’은 우리가 공공연히 내걸고 싸우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최대강령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개량의 강령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행 요구들은 만일 혁명가들이 공공연히 그 길을 안내한다면 혁명적 도전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이행 강령의 전술적인 활용 방법은 지역적이고 일시적인 조건들,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과 의식에 달려 있다. 대중들이 행동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 시기에, 이행 강령을 (선전과 달리) 선동하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강령을 가리고 개량주의적 환상을 부추긴다. 그러한 경우에 이행 요구들을 선동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거대한 변혁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그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이행 요구들을 여기에 열거한다.
노동력 축소는 점점 더 계급투쟁에서 자본가들의 핵심적인 무기가 되고 있다. 우리는 완전고용, 전면적인 공공노동 프로그램, 모든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신축적인 노동시간 운용을 주장한다. 이것은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임금을 줄이려는 자본가들의 욕구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데, 우리는 이윤을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려와 관계없이 이 요구가 인간적 욕구로서 타당한 것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방책들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부는 오로지 자본가들의 소유권을 침해함으로써만, 즉 ‘은행과 산업의 보상 없는 국유화’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시기에 만연하는 재앙이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이윤을 낼 수 있는가와 관계없이 임금연동제를 주장한다.
노동자 계급, 특히 그 억압받는 부분들에 대한 경찰 폭력이 우익 폭력배들의 공격과 더불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혁명적인 무장력 구축으로 나아가는 단계들로서 노동자 자위대, 노동자 민병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을 주장한다.
국유 생산수단에 대한 사유화가 노동자들의 성과물을 되돌리기 위한 지배계급의 무기로 폭넓게, 특히 스탈린주의 국가와 이전에 스탈린주의를 겪었던 국가에서 사용되어 왔다. 부르주아화와 사유화로 나아가는 흐름에 맞서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생산물이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산업의 기업들과 자회사들의 보상 없는 국유화를 주장한다. 우리는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은 상황에서 편협하고 생디칼주의적인 형태의 노동자 자주관리를 진정한 해결책으로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운다.
오늘날 <COFI>는 이행 요구들의 목록에 ‘채무이행 거부’라는 중대한 슬로건을 덧붙인다. 이것은 세계은행과 IMF 같은 제국주의 은행들에게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나라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노동자들의 은행 부채가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 상황과 국가 관료들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할 구실로 은행과 증권사들에게 빚진 공공부채를 활용하는 상황에 유용한 것이다.
혁명 정당은 이행 요구들의 혁명적 의미를 선진 노동자들에게 항상 명확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현 시대에 고립된 개량이나 부분적인 투쟁으로 얻은 성과물들이 지속될 수 있다는 모든 개념에 맞서 싸운다. 프롤레타리아의 강령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통일되고 집중되어야 한다는 점과 반드시 노동자 국가만이 강령을 실행해 낼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다.
종합하자면, 혁명 정당은 우리 계급에게 비밀로 하는 책략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투쟁과 정치의식 발전에 의지한다. 우리는 혁명적인 노동자 계급 단계의 전조로서 민중주의 단계나 개량주의 단계를 두는 것이 쉽게 가는 길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진실을 당장은 단지 한 줌의 전위 노동자들이 듣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미래의 대중적 발전을 불러일으키는 중핵이 될 것이다. 우리는 덜 의식적인 노동자들 몰래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당 건설에 있어서 레닌주의적인 접근을 추구한다. 대중 정당이 되기에 앞서, 핵심적인 선진 노동자들은 전진하는 길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점을 다른 앞선 노동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대중에게 선동적 요구들을 제시한다.
하나의 원칙으로서, 진정한 혁명가들은 그들의 독자적인 기치와 강령 그리고 정당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본 그대로의 진실을 노동자 계급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며 우리 계급에게 선언해야 하는 주된 정식이 <제4인터내셔널을 위한 공산주의자 조직>이라는 우리의 명칭 속에 구현되어 있다.